[영화] 항거: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유관순 스토리
항거: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유관순 스토리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내에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은 1919년 3월 1일 발생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이었지요.
3.1절 독립선언서를 준비한 33인도 있지만, 조선인 모두에게 독립 의지를 각인하고 한민족으로의 자부심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교과서에서는 단순히 3월 1일 태극기를 준비해서 만세를 부르고 행진했다고만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 현실은 어떻게 됐을까요?
조선 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900여 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신복룡 교수나 일본의 야마기 겐타로 약 50만 명 정도가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의 시작, 일제 강점기의 3.1운동
3.1 운동에서 독립투사로 이름을 남긴 영웅 중에 한 명이 유관순 열사입니다.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고,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있게 되었고,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고,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으로 참가를 말렸고,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다.
유관순 열사, 3.1 운동의 독립투사이자 조선의 소녀
하지만,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진 것으로 법정모독죄로 징역 5년형의 중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고, 다시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네요. 하지만,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반환을 요구해서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