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군 4대 전투
[역사지식]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군 4대 전투 에 대해 리뷰하려고 합니다.
조선 항일투쟁 3대 전투로 알려진,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전투는 1920년 6월 및 10월에 발생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연해주 4월 참변 및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연해주와 간도에 대한 침략과 학살로 이어지는데, 간도 8개 현의 한인들이 3,500여명 학살 및 민가 3,200여호 방화로 간도에서의 독립군 기반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1. 삼둔자 전투 三屯子 戰鬪
시점: 1920년 6월 4일
위치: 만주 삼둔자 (현재 중국 지린성 화룡현)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和龙市 西城镇 三屯子
병력규모: 조선 독립군 대한북로독군부 약 400명, 일본군 약 300명
주요 성과:
삼둔자 전투는 봉오동 전투 직전에 벌어진 전투로, 조선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토벌하고자 삼둔자 일대에 진입하였으나, 독립군의 기습적인 공격에 의해 크게 패배했습니다.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약 12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병력을 퇴각시켰습니다. 독립군 측의 사상자는 적었으며, 전투 후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났습니다.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봉오동에 집결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30여 명의 소대 규모 병력을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시켰다. 이 독립군 소대는 6월 4일 새벽에 종성에 주둔하던 일본군 순찰소대를 공격해서 섬멸시키고 귀환했다. 그러자 온성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순사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왔다.
하지만 만주로 건너온 일본군은 독립군 추격에 실패했고,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독립군 사령부는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일대에 1개 소대 병력을 매복시킨 뒤에 일본군을 그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6월 6일 오전 10시 무렵에 일본군이 그곳으로 추격해오자 공격을 가해서 궤멸시켰다.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첫 번째로 벌인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본군 1개 소대를 섬멸했을 뿐 아니라, 삼둔자 전투에서 추격해온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삼둔자 전투의 승리는 뒤이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2. 봉오동 전투 鳳梧洞 戰鬪
시점: 1920년 6월 7일 - 6월 10일
위치: 만주 봉오동 (현재 중국 지린성)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和龙市 东城镇 鳳梧洞
병력규모: 조선 독립군 약 700명, 일본군 약 1,500명
주요 성과: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입니다. 일본군은 15대대 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했지만, 독립군의 기습 공격과 지형을 활용한 전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일본군 157명을 사살,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고, 이후의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 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봉오동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일본과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에 독립군은 병력과 조직을 정비하고 무기를 확충하는 데 힘쓸 수 있게된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에서 "봉오동전투가 끝난 뒤 대한북로독군부 지휘 체계와 부대 편제는 유지되지 않았고, 내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신 소장은 "홍범도는 게릴라 투쟁 방식으로 전투를 지휘했지만, 최진동은 정식 군대처럼 진지전을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신 소장은 그렇기에 "최진동은 전투 대열을 무너트린 홍범도의 선택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봉오동전투는 전황만 보면 독립군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면 독립군 해체의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봉오동 땅의 소유자로서 홍범도 부대가 봉오동에 주둔할 때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제공한 최씨 3형제가 봉오동 기지를 떠나 연길현으로 이동한 홍범도의 호의적 감정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청산리 대첩 靑山里 戰鬪
시점: 1920년 10월 21일 - 10월 26일
위치: 만주 청산리 일대 (현재 중국 지린성 왕칭현)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汪清县 靑山里
병력규모: 조선 독립군 약 3,500명, 일본군 약 5,000명
주요 성과:
청산리 대첩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전투입니다.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을 섬멸하려 했으나, 독립군의 뛰어난 전술과 지형지물을 활용한 방어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약 1,2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했으며, 독립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으며, 독립군의 전투력이 입증된 사건입니다.
1920년 10월에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두만강 상류에 있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크고 작은 전투가 약 일주일에 걸쳐 벌어졌으며, 청산리 대첩은 이 전투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만든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은 매우 치열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결한 가장 커다란 싸움이었고,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많은 농민들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구할 수 있도록 돈을 내고, 식량과 옷을 마련해 주는 등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4. 대전자령 전투 大甸子岭 戰鬪
시점: 1933년 7월 11일 - 7월 16일
위치: 만주 대전자령 (현재 중국 지린성)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龙井市 晓松乡 大甸子岭
병력규모: 조선 독립군 약 600명, 일본군 약 3,000명
주요 성과: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에서 일본군과 벌인 마지막 대규모 전투 중 하나입니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압도적인 일본군 병력과 맞서 싸우면서, 3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적의 후퇴를 이끌어냈습니다.
독립군은 대전자령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술적으로 일본군을 농락하였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독립군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으며, 이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활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