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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3.1 운동 사망자: 조선총독부 553명 vs 대한민국 임시정부 7,509명**

S부장 in US 2024. 3. 1. 11:15

삼일절, 3.1 운동 사망자: 조선총독부 553명 vs 대한민국 임시정부7,509명**

 

3.1 운동: 1919년 통계 현황

 

[한국지식] 삼일절, 3.1 운동 피해현황:  사망자 7,509명 vs 553명 에 대해 리뷰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한국 역사 기록이 확인되지 않은 3천년 정도를 그대로 아무런 기술없이 뛰어넘고, 제대로 역사의 기록이 남은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고려, 조선, 조선제국, 근대 한국의 역사를 사건의 나열식으로 기술하고, 남의 일인 처럼 원인과 결과, 발생 연대만 외우는 역사 지식의 전달만을 실행하고 있지요.

 

예로, 3.1 운동이 대표적인데,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1919년 조선의 학생과 민족대표 33인이 기습적인 독립선언문 발표와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개최했고, 일본이 놀랐다고 기술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조선이 평화적인 시위를 펼쳤다고 하는데, 그대로 체포되고 고문받다가 풀려나고 말았을까요?

 

3.1 운동 사망자: 조선총독부 공식기록 조선인 553명, 일본 군/경찰 9명 

실제로는 조선총독부 공식기록으로는 "조선폭동사건"으로 1919년 3-4월 58만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사망자가 조선인 553명, 일본 군/헌병/경찰 9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사망자가 553명이고, 부상 1.409 명, 체포 26,713 명 로 조선총독부 공식기록이 남아있습니다.

 

3.1 운동 사망자: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조선인 7,509명

 

사망자가 553명이란 것이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닌데, 박은식이 기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7,509명으로 나옵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보다 10배 이상 차이가 나지만,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이 됩니다.

 

다시, 한국의 역사교과서로 돌아가서, 3.1 운동이 평화적 시위를 펼치려 한 것은 맞지만,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과 고문으로 553명-7,509명이 순국하였던 참혹한 역사입니다.

 

한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이를 제대로 교과서에 서술하고 후손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개선되기를 희망해봅니다~!!

 

 

3.1 운동 : 일제 시대, 한반도에서의 마지막 독립운동

 

조선이 열강들의 식민지 전쟁에 희생되면서, 일본 식민지배를 1905년 또는 1909년부터 공식적으로 실행되게 됩니다.

 

이후, 1919년 3월 1일 대규모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시위가 발생하는데, 바로 3.1 운동이고 이는 중국과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요.

 

그럼, 우리가 배웠던 3.1 운동에 대한 실제 현황과 후폭풍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3.1 운동
3.1 운동 (source: kr.koreanculture.org/)

 

 

 

3.1 운동 : 단순한 시위가 아닌, 목숨건 독립투쟁

 

단순히, 독립선언문을 33인이 서명해서 기습적으로 발표하고, 태극기를 숨겨서 시장에서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외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는 일본군과 일본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많은 3.1 운동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체포, 부상 및 사망에 이르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학교에서 배운 3.1 운동은 태극기를 준비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낭만적인 설명이지만, 실제 상황은 일본군과 일본 경찰에 의한 무자비한 보복이 발생한 것입니다.

 

3.1 운동 이후, 조선반도에서 독립운동이 쇠퇴한 것도 일본의 조선총독부를 통한 냉혹한 진압작전 때문이기도 합니다.  

 

 

3.1 운동 외신
3.1 운동 외신 (source: news.kbs.co.kr/)

 

 

3.1 운동 사망자 : 사망자/부상자 10배 이상 차이

 

이에 대한 통계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조선총독부의 통계는 10배가 넘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기준으로는 3.1 운동의 피해상황이 최대치이고, 조선총독부 기준으로는 최소치가 발생하는데, 차이가 거의 10배 이상 발생합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계 : 사망 7,509 명, 부상 15,961 명, 체포 46,948 명
  • 조선총독부 통계 : 사망 553 명, 부상 1,409 명, 검거 26,713 명

 

(* 침략국과 피침략국 간의 통계가 10배 정도 발생하는 것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조선의 미래, 현재의 한국 : 7,509명의 유관순 희생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합니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는데,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 회, 사망 7,509 명, 부상 15,961 명, 체포 46,948 명의 규모로 서술합니다. 

 

3.1 운동 현황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 기준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기간: 1919년 3-5월)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 회

사망 7,509 명

부상 15,961 명

체포 46,948

 

역사학연구소나 한영우 등은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통계를 전거로 삼았고, 많은 한국의 교과용 도서에서도 대체로 이 통계를 활용합다.

 

그런데, 3·1 운동을 진압하였던 조선총독부 쪽의 통계는 이와 크게 차이 납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소요사건일람표》(朝鮮騷擾事件一覽表)를 작성하여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의 상황을 10일 단위로 정리하였습니다.

 

이를 합산하면 4월 말까지 조선인 시위 참여자는 58만 7,641명(50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 검거자 26,713명(당일 13,517명, 추가 검거 13,196명), 시위 참가자의 사망 553명, 부상 1,409명이라고 집계됩니다.

 

또한 일본군과 헌병, 경찰의 경우 사망 9명, 부상 156명으로 집계합니다. 한편, 조선헌병사령부가 발간한 《소요사건 검거건수 조사표》(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1919.4.21-1919.4.30)에서도 총 검거 건수를 26,713 명으로 집계합니다.

 

3.1 운동 현황 : 조선총독부 통계 기준

 

참여 인원 58만 7,641 명  (기간: 1919년 3-4월)

사망 553 명

부상 1.409 명

체포 26,713 명 

 

일본군, 헌병, 경찰 

사망 9 명

부상 156 명

 

박은식의 통계는 3월에서 5월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고 조선총독부의 것은 4월 말까지를 정리한 것이어서 단순한 비교는 어렵습니다.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하여 장렬하게 투쟁하고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받았음을 기억하려는 독립운동 진영과 그들의 통치에 저항한 사람이 적었으며 탄압 또한 질서유지를 위한 정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통치자 측의 의도가 일정하게 반영된 수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 통계를 보아도 3·1 운동은 일제 강점 이후 유래가 없는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통계도 당시 조선의 매체에서 언급된 희생자를 모두 통합한 최대치로 일부 중복이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최대 숫자부터 확보해서 확인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3.1 운동, 미국 로컬신문 1면 톱기사
3.1 운동, 미국 로컬신문 1면 톱기사 (source: news.kbs.co.kr/)

 

3.1 운동의 의의 : 조선독립의 공감대 및 독립활동 본격화

 

3.1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는, 윤치호가 3.1 운동을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3.1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선동이 있다는 비판이 당대부터 제기되었는데, 기독교 운동가이자 이화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창제는 윤치호에게 자신이 3.1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로, 만세 운동 당시 누군가에 의해 각종 미신과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3.1 운동에 대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하고 있어서 동조할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3.1 운동을 유도해서, 자신들의 식민지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역이용 작전으로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3.1 운동 이후에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의 무력통치가 강화되면서, 조선반도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만주, 연해주 및 중국에서만 가동되는데, 일본의 계획으로도 소요사태를 유도한 측면이 있는 듯 하네요.

 

즉, 일본제국이 거의 20-30년에 걸쳐서 대동아 공영권을 추진하면서, 만주 및 중국에 대한 침략을 자작극을 벌여서 시작하는 패턴이 있는데, 조선의 반발을 유도해서 공격하려던 교묘한 역공작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3.1 운동 : 현재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자, 한민족의 자유의지 상징

 

개인적으로도, 단순한 태극기 시위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데, 당시의 많은 조선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고초를 겪게 된 희생에 숭고하고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이 조선독립이라는 대업으로 공감대를 표출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인 만주, 연해주, 중국 및 미국에서의 독립 활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더욱 체계화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제의 암흑시대를 조선반도와 만주, 중국 및 미국 등에서 지속적인 독립활동을 펼친 결과로,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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